옛날에 조선 선조 때 임제라는 사람이 있었다.
호를 백호라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임백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임백호는 재주가 있고 글도 많이 배워서 글과 시를 남보다 뛰어나게 잘 지었다.
임제의 대표적인 시가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盞) 잡아 권할리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임제가 평안도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읊은 작품이다.
임백호는 나라의 일을 돌보아야 할 벼슬아치들이 당파로 갈라져서 서로
다투기만 하고, 나라 정사에는 조금도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한탄하여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경치 좋은 산수를 찾아다니면서 글이나 짓고 세월을 보냈다.

한 번은 속리산을 갔는데 법주사의 중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면서 음식 장만을 한다,
방을 새로 도배한다 하며 법석이었다.
임백호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충청감사가 놀이를 온다고 하므로 그를 맞이하려고 그런다고 했다.
임백호는 이 말을 듣고 충청감사를 괘씸히 여겼다.
감사라 하는 것이 정사나 잘 보살필 일이지, 부질없이 절간 놀이나 다니면서 중들까지 괴롭혀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충청감사는 임백호와 동문수학하여 출세한 인물이기에 더욱 괘씸하게 여겼다.
그래서 감사를 한 번 놀려 주려고 마음먹고 중들에게 자기의 꾀를 미리 일러놓고, 말 오줌 한 병과 상좌 두 명을 달라고 했다.
임백호는 절에서 보일까 말까 하는 데 가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밤이 깊어서 사방이 고요하게 되자, 옥퉁소를 내어 불며 상좌들에게는 파란 옷을 입혀 춤을 추게 했다.
충청감사는 절의 중들이 차려 준 음식과 술을 먹다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퉁소 소리를 듣고 저게 누가 부는 퉁소 소리냐고 물었다.
중은,
“예에, 속리산은 명산이오라 날씨가 온화하고 달이 밝은 밤에는 가끔씩 신선이 내려와서 저렇게 옥퉁소를 부는 일이 있습니다. 아마 오늘 밤에도 신선이 내려와서 퉁소를 불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아주 그럴듯하게 말했다.
감사는 원래 속리산의 신선을 만나 보려고 왔던 터라 이렇게 오는 날 신선이 나타났다는 것을 천행으로 생각하고 곧 자리를 떠서 혼자 신선을 만나러 갔다.
멀리서 보니 늙은 소나무가 우거진 사이의 반석 위에 신선이 앉아서 퉁소를 불고, 그 퉁소 소리에 맞추어서 파란 옷을 입은 동자 둘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감사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 반석 가까이까지 가서 가만히 엎드려 신선이 노는 것을 구경했다.
이윽고 퉁소 소리가 멈추더니,
“거기 있는 게 충청감사 아니냐?”
하는 점잖은 소리가 들렸다.
감사는,
“예에, 그렇사옵니다. 속된 몸이 감히 신선님이 내려오신 데를 찾아와서
죄송하옵니다“
하고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신선은,
“네가 오는 줄 알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하고 말했다.
감사는 조심조심 바위 위로 올라갔다.
신선으로 변장한 임백호는 동자더러 병 속의 것을 부어 주라고 하고는,
“네 정성이 지극해서 신선 주를 한 잔 주는 것이다. 이 술을 마시면 불로장생하고 흰머리가 도로 검어지느니라“ 하고 말했다.
감사는 신선이 손수 주는 신선주를 공손히 받아 들고 마셨다.
“맛이 어떤고?”
“예에, 아무 덕도 없는 속된 인간이 신선이 계신 데를 감히 범하였는
데에도 꾸짖지 않으시고 신선주까지 주시니 그 술맛 비할 데 없사옵고 그 향기 배 안에 가득하옵니다“ 하고 대답했다.
신선은 또,
“오늘 여기 선경(仙境)에 왔다는 표적을 해 줄 테니 손에 든 부채를 이리 올려라“ 라고 했다.
감사는 더욱 공손히 부채를 신선에게 올렸다.
신선은 필낭(筆囊)에서 붓을 꺼내더니,
구름이 겹겹 서린 속리산
향기로운 풀이 있는 바위 위에서
곱게 생긴 동자가 속세의 사람에게
술 한 잔 먹여 보내는 도다.
라고 부채에 써 주었다.
감사는 더욱 감격해서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 백배사례 하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거기를 물러났다.
이 감사는 그 뒤로 자기는 속리산에 가서 신선을 만나보고 신선주까지 얻어먹었노라고 자랑했다.
어느 날, 어떤 자리에서 감사는 또 신선을 만나보고 신선주까지 얻어먹었다는 자랑을 했다.
그 자리에는 임백호도 있었다.
임백호는 신선이 있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라고 했다.
그래도 감사는 자기는 신선을 만났다고 우기면서,
“자네 같은 사람은 백번 죽었다 깨어도 신선을 볼 수 없겠지만 나는 내 눈으로 신선을 보았을 뿐 아니라 술도 얻어먹고 선경에 갔던 표식으로 부채에 신선의 글까지 받아 왔으니 못 믿겠는가?” 하면서 문갑 속에 간직해 둔 부채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러나 임백호는,
“그 부채를 가져올 것 없네. 자네가 하도 미련한 생각을 하고 있기에 내가 자네를 놀리느라고 속리산에서 신선 노릇을 해 보인 걸세” 하고 말했다.
감사는 이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대들었다.
임백호는,
“나보고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고 하지만, 신선이 자네 부채에다 써 준 글귀 그것이 바로 내가 써 준 걸세" 하면서,
구름이 겹겹이 서리운 속리산..............

하며 그 글귀를 읊었다.
감사는 그제서야 임백호에게 속은 것을 알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끝-
<이 게시물은 저작권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으로 퍼가거나 공유 배포를 금지합니다> 조월화인
'galle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칠 대나 꺼뜨리지 않은 불 (0) | 2023.09.01 |
|---|---|
|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 (0) | 2023.09.01 |
| 춘향전 (0) | 2023.09.01 |
| 청실홍실 천생연분 (0) | 2023.09.01 |
| 청개구리 (0) | 2023.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