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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월화인의 세대공감 &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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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실홍실 천생연분

by 釣月畵人 2023. 9. 1.

한 마을에 살림이 넉넉하고 학식도 있는 젊은 서생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찍 아내를 맞고 싶어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길을 가는 데 한 노파가 달빛 아래 정자에 앉아서 열심히 책을 뒤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파의 옆에는 자루가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는 붉은색 실이 가득했다.

호기심을 느낀 서생이 노파에게 다가가 정중히 물었다.

"할머니, 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보십니까?"

노파는 "천하 남녀의 혼인에 관한 인연을 기록한 책이라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더욱 호기심을 느낀 서생은

"그럼 포대에 든 이 홍실은 어디에 쓰시는 겁니까? "라고 물었다.

노파는 미소를 지으며

"이 홍실은 장차 부부가 될 남녀의 손발을 묶는데 쓰지. 그 두 사람이 설사 원수의 집안이거나 이역만리 떨어져 있거나 또는 빈부차가 아무리 심할지라도 이 홍실로 한데 묶어놓기만 하면 결국에는 부부가 된다네."라고 대답했다.

노파의 말을 들은 서생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농담을 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괴상한 노파에 대해 궁금해서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그 순간 노파는 몸을 일으키더니 책과 자루를 챙겨 시장을 향해 걸어갔다.

서생은 노파를 쫓아갔다.

주막에 도착한 두 사람의 눈에 애꾸눈의 여인이 세 살 가량의 여자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파는 서생에게

"저 아이가 바로 장래 자네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네."라고 알려주었다.

서생은 이 말을 듣고는 노파가 일부러 자신을 모욕하려 한다고 여겨 화를 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분을 참을 수 없었던 서생은 하인을 시켜 아까 본 여자아이를 죽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장차 자신의 아내가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명령을 받은 하인은 곧장 주막으로 달려가 아이를 칼로 찌르고 달아났다.

서생은 다시 노파를 찾아가 책의 내용이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노파는 흔적을 감춘 뒤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14년이 흘렀다.

서생은 과거를 보고 급제하여 조정에 다니는 관리가 되었는데 이조판서 대감의 눈에 들어. 예쁘기로 소문난 자기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애석하지만 딸의 미간에 상처가 하나 있다는 것도 미리 밝혔습니다.

서생은 이상하게 느껴 장인이 될 대감에게 물어보았다.

"따님 미간의 상처는 어쩌다 생긴 것입니까?" 그러자 대감은

"그 상처는 아이의 목숨과 바꾼 것이지. 14년 전 지방 현감으로 있을 때 유모가 아이를 안고 시장에 갔다가 주막 앞에서 갑자기 웬 미친놈의 칼에 찔렸다네. 다행히 아이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이마에 이런 상처를 남겨놓았다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라고 말했다.

서생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곧 14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서생의 마음속은 순간 놀라움과 부끄러움, 의혹이 교차했다.

'설마 그녀가 정말 내가 살해하라고 시켰던 그 아이란 말인가?'

서생은 이를 확인하려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유모가 애꾸가 아니었나요?" 하고 묻는 서생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 대감은

"그렇다네, 분명 한쪽 눈이 먼 아낙이었지! 그런데 자네가 어찌 그 사실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서생은 전에 노파가 말했던 예언이 사실이 되자 경악한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서생은 14년 전 월하노파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감도 그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서생은 당시 노파가 자신에게 허튼 소리를 한 것이 아니며 하늘의 뜻은 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죽는 순간까지 진심으로 아내를 아끼는 좋은 남편으로 살았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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